•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다년생과 일년생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요즘 화단에 식물 심기가 한창이다. 헤아려보니 나 혼자 관리해야 할 화단의 개수가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올해 내가 고른 식물의 조합은 보라와 분홍 그리고 흰색이다. 보라색 꽃을 피우는 매발톱·댈피니움·로벨리아를, 분홍색으로는 숙근세이지·사계국화·너도부추를 넣었다. 여기에 흰색이 들어가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색감이 연출된다. 잎 자체가 하얀색인 백묘국과 은사초·은쑥을 넣고, 안개초를 씨로 뿌려 마감했다.   행복한 가드닝 웬만큼 식물을 좋아하는 분들이 꼭 묻는 질문이 있다. “다년생인가요? 월동은 하나요?” 한 번 심으면 내년에도 죽지 않고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라는 걸 잘 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다년생의 경우는 한번 심으면 그 자리를 영원히 차지해 화단에 변화를 주기 어렵다. 더불어 다년생은 늙어감을 어쩔 수 없다. 4, 5년이 지나면 뿌리째 캐내 포기나누기를 해주지 않으면 꽃을 잘 피우지 못한다. 그런데 이 포기나누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흙 자체를 퍼 올리고 나눠주는 일이 육체적으로 힘겹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년생과 월동을 하지 못해도 한 해 동안 풍성한 꽃을 장시간 피워주는 식물들을 권장한다. 일년생은 대부분 3~6개월 동안 꽃을 피워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빈자리가 생겨, 내가 좋아하는 식물로 바꿔볼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 게다가 일년생이라고 무조건 키가 작은 게 아니다. 해바라기는 2m를 넘어서고, 솔채·버베나·각시꽃 등은 사람 허리 정도까지 차오른다. 씨앗 발아도 일년생이라면 초보자의 경우도 실패가 거의 없다. 화분에 담아 실내에서 키우는 것도 일년생이 훨씬 유리하다.   정원은 ‘장식하고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생활공간이다. 그 안에서 심고, 가꾸고, 그걸 요리에도 쓰고, 꽃병에도 꽂아두고, 차로 마시기도 한다. 또 올해 어떤 식물을 키워볼까, 그 설레는 꿈을 꾸어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4.04.17 00:18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봄나들이 꽃나들이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봄꽃 개화가 빨라지는 중이다. 속초는 4월 5일 즈음에 벚꽃이 만개하는데, 올해 기상청은 3월 말에 필 것이라고 했다. 바닷물과 강물이 섞이는 석호, 영랑호 인근에서 벚꽃 축제와 함께 내가 개최하는 봄꽃 마켓도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현지의 날씨는 매우 달랐다. 설악산엔 아직도 흰 눈이 녹지 못했고, 벚꽃은 구름 낀 날씨에 꽃망울조차도 부풀어 오르질 못했다.   행복한 가드닝 벚꽃 없는 축제를 강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2주 전부터 초비상이었지만 결국은 그대로 진행하고, 1주일 뒤 한 번 더 축제를 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행사 당일 하늘은 햇살과 구름이 연거푸 퍼레이드하듯 돌아다니고, 순간적으로 불어대는 돌개바람은 현수막과 꽃수레를 뒤집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이 추위를 뚫고 오겠나, 나와 관계자들의 얼굴도 굳어져만 갔다. 하지만 오전 10시를 기점으로 반전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봄나들이를 와주었기 때문이었다. 몰려든 사람들의 기운이 날씨조차도 바꾼 것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기온도 온화해지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결론적으로 쌀쌀한 봄날에 벚꽃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열기로 즐거운 축제장이 되었다.   사실 정신적으로는 봄이 올 때 기운이 오히려 떨어지고 슬프고 우울해진다는 정신적 타격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의학적으로는 ‘봄철 우울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춘곤증’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증상은 4월에 절정에 달하는데, 이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론 봄나들이가 최고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이제 막 싹이 올라온 식물을 쪼그려 앉아 지켜보고 산책을 하다 보면 새 기운이 채워진다. 왜 매년 봄이면 우리 민족이 꽃나들이를 했는지, 그 지혜가 놀랍다.   이제 봄꽃 시장이 활짝 열렸다. 꽃을 보러 가는 그 마음만으로도 무기력을 이기기에 충분하다. 올봄은 이런저런 이유 대지 말고 나를 위해서라도 봄나들이, 꽃나들이 꼭 가보자.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4.04.03 00:30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땅이 풀리듯이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보름간의 해외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마당을 서성였다. 서둘러야 할 일이 있었다. 작년 늦가을 때를 놓친 알뿌리를 이제라도 심어줘야 했다. 땅이 녹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응달엔 아직도 눈이 쌓여있어 불안했는데 막상 땅을 파니 푹신하게 삽이 들어갔다.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을 넘겼으니 아직 눈은 있어도 땅이 벌써 훈훈해졌다는 의미였다.   행복한 가드닝 사실 땅이 얼었다 녹는 일은 온대기후를 지닌 땅만이 누리는 축복이기도 하다. 한번 언 땅은 쇠꼬챙이로 쑤셔도 들어가질 않는다. 심지어 온도가 아무리 일시적으로 따뜻해져도 겨울엔 절대 이 땅이 녹지 않는다. 이건 바깥 기온과는 별도로 땅 스스로 온기를 머금어 주지 않으면 얼음이 녹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이 녹는 현상을 ‘땅이 풀린다’고도 하는데 나는 이 표현을 참 좋아한다.   이건 단순히 눈이 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무엇인가가 풀린다. 우선 눈 속에는 공기 중의 질소·산소 등이 들어 있다. 이게 눈 속에 갇혀 있다 물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땅에 풀려 식물들이 흡수할 수 있는 영양분이 된다. 또 딱딱한 흙이 얼음으로 팽창이 되었다 녹으면 흙에 공기구멍이 생긴다. 두부를 냉동실에 넣었다가 빼내면 수분이 있던 곳에 구멍처럼 공기층이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공기구멍으로 성장하는 식물의 뿌리가 뻗어나간다. 이 모습도 분명 뭔가 풀려나가는 모습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녹은 물이 흙 알갱이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부풀어 오르면 굳이 쟁기질을 하지 않아도 땅 스스로 일굼이 일어난다.   새벽부터 시작했지만 튤립·수선화·히야신스의 알뿌리를 다 심고, 원예 상토를 덮어주고, 물을 주고 나니, 해질녁에서야 정원일이 끝났다. 허리를 펴기도 어려울 정도로 온몸이 뻐근하지만, 땅이 풀렸으니 그 위의 식물도 잘 자랄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삶도 이 봄, 부드럽고 뽀송하게 잘 풀어질 것이라고도 믿는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4.03.20 00:16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정원의 진화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누구에게나 개방된 정원이란 의미의 ‘공원(Public Park)’의 효시는 영국의 ‘비컨헤드 파크’다. 정원사 출신으로 하원의원까지 올랐던 조셉 팩스톤이 1847년 주민들을 위해 만든 정원이었다. 이 개념에 감동을 받은 미국 조경가 프레드릭 옴스테드는 뉴욕 맨해튼 공원 공모전에 바로 이 개념을 선보여 입선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곳이 ‘센트럴 파크’다. 뉴욕에는 그 외에도 수많은 공원이 만들어져 ‘공원의 천국’으로 불린다.   행복한 가드닝 최근 뉴욕에선 이 공원의 개념이 좀 더 진화하고 있다. ‘사유지지만 공개되는 정원’이라는 개념으로 재력가들의 공원 기증이 줄을 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인 ‘리틀 아일랜드’(사진)는 2021년 허드슨 강가에 만들어진 매우 독특한 인공섬 공원이다. 튤립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높낮이를 달리해 조합한 독창적인 구조다. 원래는 이 자리에 55번 방파제 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허리케인 샐리에 의해 붕괴되자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자선가가 등장한다. 딜러-폰-퍼스텐버그 가족 재단이 디자인 및 시공 비용과 향후 20년 간의 관리 비용까지 맡기로 한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 이 ‘리틀 아일랜드’가 한눈에 보이는 허드슨 강가에 잠시 머물고 있다. 벼르고 벼른 ‘도시 정원’ 공부를 위해서다. 정원 공부가 깊어질수록 도시 공원 중요성을 더욱 깨닫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도시화는 막을 수 없는 일이 되었고, 이로 인해 개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정원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정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진화 중이라고 믿는다.   흔히 공원을 ‘민주주의의 꽃’이라고도 한다. 이유는 왕족·귀족의 점유물이었던 정원을 누구나 공유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원 하나를 만드는 일에는 많은 고려와 지원이 필요하다. 이 아름다운 꽃이 우리의 협업으로 좀 더 활짝 피어나 우리 도시에도 더 많이 와 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4.03.06 00:18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나의 환절기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어제 보니 우리 집 수선화가 벌써 손가락 마디 정도로 자란 게 보였다. 봄이 왔음을 알리는 첫 선수의 입장이다. 수선화를 시작으로 튤립의 싹이 올라올 것이고, 그 사이 우리 집 앞 설악동 길엔 수백그루의 벚꽃이 팝콘처럼 하얀 꽃을 피워줄 것이다. 그때 쯤 우리 마을 소나무 숲에선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울어대고, 화단엔 화초와 잡초가 뒤섞여 올라올 것이다. 하지만 이 예측된 모든 일이 만약 오지 않는다면?   행복한 가드닝 봄이 와주지 않고, 태양이 맑은 햇살을 보여주지 않고, 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식물이 피어나지 않는다면? 이 모든 두려움의 상상이 요즘 공상과학영화의 단골 주제라는 걸 잘 안다. 지난해 자연생태복원기사 시험을 치렀다. 정원 일을 통해 터득한 자연의 이치를 정원디자인에 접목해 해보고 싶어서였다. 생태디자인은 영국 유학시절에도 배운 경험이 있다. 그때 지도교수였던 피터는 ‘자연의 복원력(Resilience)’이란 단어를 수도 없이 강조했다. 자연은 ‘원래의 생태계로 돌아가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자연의 복원력도 한계가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자연의 한계점이 12시라면 우린 이미 11시 55분을 넘어섰다고도 표현한다.   며칠 전에 갑자기 뜨거워진 기온 탓에 차 안이 더워져 문을 열어 놓고 달렸는데, 그 날밤 폭설이 내리는 신기한 날씨 쇼도 경험했다. 우수와 경칩을 지나는 환절기에 접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환절기도 몇 번은 더 나를 들었다 놨다 괴롭히겠지만 올해는 그리 싫지가 않다. 환절기는 아직은 자연이 돌아와 준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내가 나의 정원에 봄꽃을 심을 수 있는 예약 티켓이라는 것도 안다. 식물 시장으로 달려가 봄꽃을 잔뜩 사들였다. 호주매화에 백묘국, 아네모네, 방울철쭉나무까지. 아직은 이 봄이 이렇게 나를 어김없이 찾아와 주니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자연을 위해 뭐든 하긴 해야 한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4.02.21 00:26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묵음 처리된 창문을 열자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대설주의보 알람이 요란하게 울린다. 영동지방의 폭설예보다. 설악산 인근에 내리는 눈은 절대 낭만적이지 않다. 눈을 치우는 속도가 내리는 속도에 따라 잡히면 큰일이다. 눈이 종아리를 웃돌 정도만 되어도 여닫이문은 그 어떤 힘으로도 열리질 않는다. 다행히 한옥은 미닫이문이 많아 집 탈출은 가능하지만, 문제는 대문이다. 대문까지 10m 남짓한 길을 내는데도 몇 시간이 걸리고, 대문이 열리려면 그 반경을 다 치워야 한다. 그것도 얼기 전에. 그렇지 않으면 세상 부드러워 보이는 눈이 곡괭이로 내리쳐도 깨지지 않는 차갑고 쌀쌀맞은 얼음덩어리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눈이 다 고약한 건 아니다. 치운 눈을 화단에 쌓아두면 봄에 눈이 녹으며 식물들에 물을 공급해줄 수 있다.   행복한 가드닝 내 삶은 전원생활을 하기 전과 후로 나뉘는 듯하다. 도시에서의 삶 속에 자연은 늘 창밖에 있었다. 묵음 처리된 화면처럼 소리 없이 창밖에서 때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소리를 없애면 세상 무서운 호러 영화도 우스운 분장효과로만 보이듯, 창 하나를 두고 그렇게 자연은 그리 두려울 것도 다정할 것도 없는 현상일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늘 날씨에 노심초사다. 눈뿐만이 아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은 각종 물품을 동여매느라 정신없고, 폭우엔 하천의 범람을 걱정한다. 교통정보보다 날씨예보가 우리 삶에서 훨씬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 자연과의 몸살이 몸에 변화를 준 것도 사실이다. 추운 날, 더운 날 할 것 없이 자연에 노출이 되다 보니 늘 달고 다녔던 두통과 코막힘 증상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과학적인 분석은 모르지만, 이게 내 몸이 자연에 부대끼며 생겨난 일종의 탄력임을 깨닫는다. 묵음 처리된 창밖의 자연은 우리 몸에 경고를 못 보낸다. 창문을 열면 들리지 않던 화면에 소리가 들려 올 것이다. 그게 어떤 소리든, 자연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오경아 정원디자이너 오가든스 대표

    2024.02.07 00:20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우리도 겨울잠이 필요하다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속초 동명항 주변 해변은 엊그제 내린 눈이 녹지 않아 하얗게 밝다. 속초엔 두 가지의 눈이 내린다. 설악산에 내리는 눈과 바다에 내리는 눈이다. 설악산에 내리는 눈은 눈꽃 결정이 그대로 보일 정도의 굵은 눈발이지만, 온도가 높은 바닷가엔 반은 비, 반은 눈이 가늘고 곱게 흩날린다. 하지만 모두 한 번 내리면 1m 넘게 쌓이는 폭설일 때가 많다. 이런 눈이 오니 속초 사람들은 눈이 내린 후엔 가급적 이동을 하지 않는다. 마당에 내린 눈을 겨우 사람 다닐 폭으로만 쓸어 내고, 며칠은 집안에서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행복한 가드닝 남편과 나는 몇 달 전부터 집수리를 위해 바닷가 인근의 아파트로 이주했다. 바닷가 아파트에 거주하다 보니, 가끔씩 바다를 쩌렁쩌렁 울리는 안내방송을 집안에서 듣곤 한다. “우리 바다에 해양성 너울이 치고 있으니 바다로 나가지 말아주십시오”라는 방송이다. 너울이 치는 날은 바다에서 묘한 울림의 소리도 들려온다. 이렇게 너울과 높은 파도가 며칠 계속되면 문을 닫는 가게도 속출한다. 바다에 나가지 못해 생선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을 못 여니 안달이 날 법도 한데 대부분의 상인은 이리됐으니 쉬어본다, 그리 맘을 먹는 듯 여유롭다.   설악산 밑, 이제는 바다 옆에 살아보니 자연을 가까이 두고 사는 사람들은 기다림에 익숙하다는 걸 알게 된다. 풍랑이 치는데 굳이 나가야 할 일이 없고, 눈 쏟아지는 산을 굳이 올라야 할 일이 없다. 자연 스스로 가라앉기를 기다릴 뿐이다.   정원에도 겨울잠이 찾아온다. 모든 식물이 잠시 멈추고 기다리는 시간이다. 어떤 생물학자는 인간에게도 겨울잠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금 늦게 일어나고, 덜 움직이고, 일찍 자는 겨울 생활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봄이 오길 기다리는 조급함도 덜어내야 할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 겨울이 주는 조금 게을러질 수 있는 여유도, 겨울잠처럼 나를 조용히 가라앉힐 시간도 필요하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4.01.24 00:04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정원의 ‘생태’ 바람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호주 멜버른의 필립아일랜드에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펭귄 종이 서식한다. 펭귄들은 매일 아침 해변을 떠나 남극까지 헤엄쳐 나간다. 집에서 기다릴 새끼들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다. 저녁 8시 즈음은 수천 마리의 펭귄이 무리 지어 돌아오는 때다. 이제 조용했던 해변은 시장통이 된다. 부모 찾아 우는 새끼들의 소리, 엄마가 새끼를 찾는 소리, 종종 싸우는 소리까지. 근 2시간 가량 벌어지는 매일 밤의 대소동이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정해진 장소에서 숨죽여 지켜본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펭귄이 이렇게 가까이 살고 있음을, 남극이 그리 멀지 않음을, 삶의 현장은 펭귄이나 우리나 똑같이 힘겹고 고달픔을 공감하며 펭귄의 존재를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져간다.   행복한 가드닝 호주 국립공원은 2000년대로 접어들며 ‘에코 투어리즘’을 표방하고 있다. 이 펭귄 퍼레이드를 지켜보는 ‘로열석’은 10만원 정도로 상당히 비싸다. 이렇게 모은 돈은 다시 펭귄의 서식지와 환경을 보호하는 데 쓰인다. 펭귄이 중요해서가 아니다. 생태계의 구멍 난 자리가 일으킬 이 지구의 변화가 결국 우리에게도 재앙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정원에도 ‘생태’ 바람이 거세게 분다. 인간이 심어놓은 식물을 보고, 동물들이 찾아오면서 정원엔 작은 생태계가 생겨난다. 전문가들은 이 생태 정원이 도시가 안고 있는 많은 환경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지금 세계 많은 도시의 정원은 살충제 대신 오히려 곤충과 작은 동물의 서식지를 정원에 만든다.   속초의 우리 집 정원에도 겨울이 깊어지는 중이다. 남편은 산딸나무에 사과를 걸어두고, 언 돌확의 물을 녹여놓는다. 직박구리, 동박새, 가끔은 족제비까지 우리 집 정원을 찾아와 주기 때문이다. 자연은 생각보다 가깝게 우리 주위를 서성거리고, 우리의 작은 손짓에도 바로 돌아와 준다. 아직은!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4.01.10 00:13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겨울정원의 꽃 ‘히스’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겨울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 히스(Heath)가 대표적인데, 과학적 이름은 에리카(Erica sp.)이다. 사람 무릎 정도까지 수북하게 자라는 관목이다. 11월에 종 모양의 분홍·흰색 꽃을 피운 후 봄까지 버티는데, ‘겨울정원’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식물이다.   겨울정원이란 개념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식물원에서 1990년대 말에 선보인 후, 정원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상록의 잎을 지닌 침엽수, 가지에 특별한 색을 지닌 나무(말채나무·버드나무·벚나무 일부 종), 꽃을 피우는 히스 등을 이용해 만든다. 국내 일부 수목원에서도 이 겨울정원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다.   행복한 가드닝 겨울정원의 핵심 식물인 히스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원예종은 웨일스의 원예가 아서 존슨(1873∼1942)이 만든 품종(Erica×darleyensis ‘Arthur Johnson’)이다. 10년 공을 들여 만들어낸 이 식물은 꽃이 유난히 탐스러워 전 세계적으로 인기다. 우리나라에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선 쉽게 구할 수 없다. 이 식물을 수입하는 업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시장의 원리는 간단하다.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없다.   얼마 전 한 상업 공간에 식물을 심으러 갔다. 한참 튤립 알뿌리를 심고 있는데 누군가 지나가다 한마디 한다. “그거 몇 알만 주면 안 되나요?” 안 된다고 하니 “나중에 내가 캐 가면 되지 뭐!” 쏘아붙이고 가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카페를 하는 어느 사장님은 바깥 화단에 예쁜 꽃을 심어놓으면 전부 캐가서 아예 심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산과 들에서 캐고, 옆집에서 좀 많다 싶으면 캐어 나눠주는 문화 탓이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정원문화는 식물을 사고, 소비해주는 문화에서 생긴다. 정원에 심을 식물은 반드시 사주어야 하고 그래야 더 많은 식물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12.27 00:15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벌레와 식물의 공존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식물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벌레나 균·바이러스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죽기도 한다. 식물이 무작정 당하는 것은 아니다. 식물은 벌레의 공격을 받으면 특유의 가스를 분출한다. 옆에 있는 식물에 위험을 알리는 방법이다. 위험신호 ‘봉화전송’이라고도 부른다. 이 가스를 감지한 인근 나무들은 톡신이라는 벌레 퇴치 화학성분을 만들어내 생존에 성공한다.   그런데 요즘 사정이 달라졌다. 식물의 이 같은 생존 방식이 흔들리고 있다. 특정 벌레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특정 식물을 말살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런데 식물을 죽이는 벌레는 나쁜 생명체일까? 다 죽여야 할까? 과학자들의 판단은 다르다. 이 벌레가 있어야 수분(꽃가루받이)도 일어나고, 죽었을 때 분해자 역할도 한다. 식물은 벌레가 파고들어 생명을 위협하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만들어 벌레의 수를 제한한다. 이런 팽팽한 균형 덕분에 지금까지 숲은 자리를 지켜왔다. 그렇다면 이 균형은 왜 깨지는 걸까.   행복한 가드닝 하루에도 지구에서는 수십만 평의 숲이 사라지고, 그곳에 밭이나 농장이 생긴다. 여기에는 바나나·파인애플·알로에·커피·차·옥수수 등 단일작물이 재배된다. 이 단일 작물은 벌레·균·바이러스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그러니 수효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식물의 자생력으로는 퇴치가 불가능해진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이 대량으로 살충제를 살포하는 것인데, 이게 또 다른 생명체를 송두리째 죽이는 원인이 된다.   그동안 내 정원에서 약을 친 경우는 없다. 그러니 죽는 식물도 생긴다. 그래도 정원의 식물이 다 죽어 초토화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정원은 작은 지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내가 심었지만 분명 그들끼리의 생태계가 존재하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분명 종은 달라도 너와 나의 배려가 꼭 필요하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12.13 00:18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유칼립투스의 비밀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잠시 호주에 머무는 중이다. 이곳은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었다. 시드니 공항에 내려 시내를 향하는 동안 고속도로 주변의 풍채 좋은 유칼립투스 나무가 눈길을 끈다. 호주를 대표하는 자생식물로 손바닥만한 것부터 수십m에 이르는 것까지 800종이 넘는다.   유칼립투스의 조상은 원래 열대우림 태생이다. 3000만년 전 호주에 들어온 뒤 가물고 바람 많고 척박한 기후를 이겨내기 위해 유칼립투스는 변화를 꾀한다.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 잎은 작아지고 두툼해졌다. 껍질은 빛을 반사하는 흰색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꽃이 특이해졌다. 유칼립투스는 그리스어로 ‘잘 덮인’이라는 뜻이다. 꽃잎 없이 수십 개의 수술로 꽃을 피우고 이를 고깔로 덮어 보호해서 붙인 이름이다.   행복한 가드닝 유칼립투스는 호주 숲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파괴자이기도 하다. 호주의 산불은 대부분 자연발화다. 바짝 마른 유칼립투스 껍질이 바람에 비벼대다 뜨거운 온도에 불이 붙기 때문이다. 기름을 머금은 유칼립투스는 산불을 더욱 키운다. 인간의 힘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할 만큼 수십일간 계속되는 산불은 말 그대로 숲을 초토화한다. 그런데 이 잔인한 파괴 속에도 반전이 있다. 유칼립투스는 본체는 타도 밑동이 살아남아 여기에서 새로운 줄기와 잎이 다시 나온다. 늙은 몸을 버리고, 새 몸을 얻는 셈인데. 이걸 전문용어로는 ‘리그노튜버(Lignotuber)’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다. 덩치 큰 유칼립투스가 타면 그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씨앗들이 드디어 싹을 틔울 기회가 찾아온다. 숲이 몇 년도 안 돼 다시 일어서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칼립투스를 키울 수 있다. 요령은 자생지를 기억하면 된다. 영하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니 겨울엔 실내로 들이고, 햇볕·바람이 적당한 남쪽 창가에 둔다. 물은 매일 주기보다는 흙이 마른 후 흠뻑 주는 방식이 좋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11.29 00:36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씨앗의 선택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가을은 식물이 씨앗을 떨어뜨리는 계절이다. 자식을 대지에 내보내는 파종의 시간이다. 원예 분야에선 그간 봄에 씨앗을 뿌리라고 권했는데, 최근엔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처럼 가을이 더 좋다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   그런데 몇 년 전, 이 이론대로 가을에 씨앗을 뿌렸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겨울을 나고 봄에 싹을 틔워야 하는데 날이 따뜻하자 바로 돋아난 것이었다. 연초록으로 수북하게 올라온 싹이 곧 몰아닥친 겨울 추위를 맞았다. 얼마나 미안하고 안타깝던지. 하지만 다음 해 봄, 반전이 일어났다. 가을의 따뜻함을 참았다가 긴 겨울을 보낸 나머지가 싹을 틔워내면서 화단은 그 어느 때보다 예쁘게 변했다.   행복한 가드닝 식물도 일종의 집단생활을 한다. 같은 씨를 뿌려도 동시에 다 싹을 틔우지 않는데 이건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지구에서 살아온 삶의 지혜기도 하다. 과학적으로는 ‘위험분산(Hedge your bets)’이라고 하는데 경제에서도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씨앗은 스스로 선택한다. 선봉에 서는 씨앗은 재빨리 싹을 틔우지만 후발대는 차분히 기다려 다른 상황이 오기를 기다린다. 선봉이 유리할지, 기다림이 유리할지는 사실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걸 생존의 ‘무작위’라고도 한다.   식물의 위기 전략은 농부들에겐 치명적이다. 한번 씨를 뿌리고, 한꺼번에 수확해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곡물의 경우 아예 유전적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해안가에 몰려오는 파도처럼 우리 삶은 정말이지 일없는 날이 없다. 그리고 우린 이 일들 속에 매번 어떤 선택을 한다. 그 결과가 초래한 값에 좌절도 하고 행복도 느낀다. 하지만 선봉에 서서 싹을 틔웠던 씨가 잘못이 없듯 우리의 선택도 무작위로 벌어진 일일 뿐이다. 그저 최선을 다해 생존하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11.15 00:17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들국화가 만발할 때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늦가을에 접어들면 정원은 오래된 맛이 든다. 초록빛 수목 잎이 붉고, 노랗게 물들고, 화단에는 가장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가을꽃이 핀다. 쾌청한 날씨 탓에 우리나라는 가을꽃이 특화된 나라다. 대표적 가을꽃으로 ‘아스타’와 ‘국화’ 계열이 있다. 둘 다 모두 우리나라가 자생지이기에 특별한 관리 없이도 잘 자라준다.   생물학적으로 아스타는 보라색·흰색으로 색상이 한정돼 있고 마치 꽃이 별처럼 피어나 학명 자체에도 별, ‘Astar’가 들어 있다. 이 이름이 생소하다면 아스타 계열의 식물인 ‘쑥부쟁이’와 ‘벌개미취’를 기억해도 좋겠다. 논두렁·밭두렁에서 바람에 나부끼며 자라기에 들국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젠 정원용으로 재배되어 ‘공작아스타’ ‘청화쑥부쟁이’(사진) 등의 이름으로 꽃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행복한 가드닝 우리가 국화라고 부르는 계열에는 ‘감국’ ‘산국’ ‘산구절초’ 등이 있다. 아스타와는 분류가 좀 다르지만 우리는 우리 땅에 피어나는 가을 들국화로 통칭하기도 한다. 아스타가 됐든 국화가 됐든 가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은 소쩍새가 우는 봄부터 잎을 틔워 장마와 무더위를 견디며 드디어 늦가을에야 꽃을 피우는 정말 오래된 꽃이다. 노랗고, 하얗고, 보라색인 이 꽃들이 장관을 이룰 때 나무들의 잎 또한 붉게, 노랗게 물들면서 가을 정원은 정말이지 극강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꽃을 피우는 건 식물엔 엄청난 숙제와 의무다. 식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찰나의 순간을 위해 그 긴 시간을 견디며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정원에서 식물과 함께 지내다 보면 식물의 삶에 내 삶이 투영될 때가 많다. 나만 이토록 삶이 고단한가, 나만 이렇게 쉴새 없이 불어내는 바람에 부대끼며 사는 건가. 문득 억울할 때마다 식물로부터 위로받곤 한다. 꽃을 피우는 건 누구라도 참 어렵고도 어렵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11.01 00:18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내년 봄을 심어보세요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가을철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말이 살을 찌워 겨울을 대비한다’는 의미다. 정원에도 딱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가을은 준비와 대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요즘 알뿌리식물 판매가 한창이다. 알뿌리식물은 식물의 역사로 보면 후반후에 나타난 진화된 식물로, 뿌리를 부풀려 영양소를 만든다. 이 영양 가득한 알은 다음 해 싹과 꽃을 피우는 데 쓰이는데 요리용 양파, 마늘 등이 여기에 속한다. 관상용으로는 튤립·수선화·무스카리·히아신스 등이 있다. 알뿌리식물이 이렇게 진화해 온 이유는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기어이 꽃을 피우겠다는 준비 정신 때문이다.   행복한 가드닝 이 알뿌리는 지금 구입해야 한다. 지금부터 땅이 얼기 전까지 묻어주는데 추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극강의 겨울 추위만 아니라면 대부분이 우리나라 겨울을 잘 이겨낸다. 오히려 추위를 타지 않으면 날이 따뜻해져도 봄을 인지하지 못해 꽃을 피우지 못한다. 만약 사두고, 때를 놓쳤다면 반드시 냉장고 안에 넣어서라도 추위를 겪게 하고, 다음 해 봄에 심는 것이 좋다.   알뿌리를 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뿌리의 선정이다. 내년 봄 화단을 상상하며 색상, 크기, 피어나는 시기 등에 맞춰 구입하면 된다. 심는 깊이는 알뿌리 크기의 4배 밑이 가장 적절하다. 물론 화분에 심을 수도 있다. 깊이가 있는 화분을 선택한다면 알의 크기가 큰 것을 밑으로, 작은 것을 위로 켜켜로 심어준다. 이걸 서양에서는 이탈리아 요리 라자냐처럼 심는다고 해서 ‘알뿌리 라자냐 화분’으로 부른다. 알뿌리 심은 화분에 꽃배추·팬지 등의 겨울꽃을 심어 계속해서 물을 주는 것도 좋다. 만약 베란다나 창가에 두어 따뜻한 기온이 유지된다면 생각보다 일찍 꽃을 보게도 된다.   정원은 늘 계절을 앞서간다. 심었다고 다 나오지는 않아도 분명한 것은 심어야 봄을 기대할 수 있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10.18 00:20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버려야 새로워진다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가을로 접어들며 속초엔 바람이 많이 불어온다. 살아보니 밤 기온이 뚝 떨어져 두툼한 이불을 찾고 며칠이 지나면 설악산 단풍 소식이 들려왔다. 발뒤꿈치에 진흙을 잔뜩 단 듯 무거웠던 올여름이 선선한 가을바람에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것도 찰나의 행복일 것이다. 식물들이 단풍을 만드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놀이를 갈 만큼 낭만적이진 않다. 겨울철 잎이 물을 빨아올리면 나무 전체가 얼게 된다. 그래서 잎을 없앨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광합성 작용을 멈추는 것인데 그럼 이때 잎에 초록색이 사라지고 남은 색인 노랑·주황·빨강이 나타난다. 이게 우리 눈에 보이는 단풍색이다.   행복한 가드닝 타로 카드에 보면 ‘죽음’의 카드가 있다. 이 죽음의 카드는 부정적 의미처럼 보이지만 해석은 좀 다르다. 죽음의 신 뒤로 떠오르는 태양이 그려져 있어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정원사에게 계절의 시작은 봄부터가 아니라 가을이다. 식물의 동면기에 접어드는 어찌 보면 잠정적 죽음의 계절, 가을이 바로 새로운 정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 시작의 기운은 나무를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떨어질 낙엽 잎맥 바로 밑에 이미 내년 봄 피울 잎눈, 꽃눈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작은 봉오리들은 모진 겨울 추위를 이겨내며 긴 견딤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내년 봄, 적당한 어느 날에 싹을 틔울 것이다. 계절에 따라 우리 삶도 에너지의 리듬을 탄다. 가을은 식물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버릴 것, 내려놓아야 할 것을 빠르게 정리하라고 부추기는 듯하다. 버려야 새로워진다.   가을 정원 화단에 수북이 떨어진 낙엽 안에서 미생물 분해가 일어나면 전체 화단에 피해를 줄 수도 있다. 화단은 낙엽을 잘 치워주고 고운 원예상토나 나무껍질로 깔끔히 다시 덮어주자. 낙엽은 한곳에 모아 삭히면 다음 해 거름으로 재활용이 가능하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10.04 00:04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관리하기 쉬운 정원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주택 정원은 다목적 공간이다. 꽃 피는 화단과 정든 장독대, 채소나 과일 키우는 텃밭  등 모든 게 필수다. 주거지인 만큼 배수나 급수 기능도 검토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담고도 뭔가 특별하고 아름다워야 하니, 작아서 더 수월하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디자인을 의뢰받아 진행하다 보면 상당수 집주인은 ‘관리하기 편한 정원’을 원한다. 그럴 거면 왜 의뢰했을까. 그런 디자인은 어쩔 수 없이 형식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사계절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고, 은근히 정원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게으름을 탓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이 마음이 점점 바뀌는 중이다.   행복한 가드닝 가끔 나는 생각해본다. 방송작가를 그만두고, 정원 일을 시작했던 게 정말 정원 그 자체가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정원을 통해 내 마음의 위로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생각을 다져보면 후자가 맞다.   나의 30대는 왜 그리 흙탕이었을까. 까닭 모를 걱정과 불안이 내 속을 휘저어 체한 것처럼 뭉칠 때마다 나는 정원에 식물을 심고, 잡초를 뽑으며 마음을 풀었다. IMF 금융위기 시절, 어쩌다 빚을 내 지은 일산의 거대한 집은 치솟는 이자로 마치 돌덩이처럼 나를 버겁게 했다. 계약직 방송작가의 삶은 바람 불면 떨어질 낙엽 신세 같았다. 내 마음을 간당간당하게 했고, 내 나이 스물아홉, 서른에 연이어 돌아가신 부모님은 끊임없는 되새김질의 슬픔이었다. 이 모든 내 감정의 흙탕을 나는 정원에서 풀고 또 풀다가, 결국 유학이라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그때 정원은 내게 무엇을 해주었을까. 아니 난 그 안에 맘을 던져놓고 그냥 심고, 캐고를 반복했던 듯싶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를 위한 정원일 뿐이다. 관리가 버거우면 그것도 제대로 된 정원생활은 아니다. 사랑도 정원도 딱 우리가 할 만큼이면 된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09.20 00:22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도시에 들인 자연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몇 년 전 속초에 강의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 집에서 멀지 않지만 환경은 사뭇 다르다. 설악산 IC에서 오가는 차량으로 4차선 도로가 온종일 소음으로 가득하다. 여기에 작은 강의실을 짓고 소음을 줄이기 위해 자작나무와 측백나무로 건물을 감쌌다. 안쪽으로 몇 평 안되는 정원도 만들었다.   지난해 봄, 양양 오일장에 갔다가 예쁜 흰닭 백봉오골계에 꽂혀서 병아리를 샀다. 남편이 나흘 고생해 닭집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닭들은 잘 살아줬다. 그러다 수탉도 없는데 암탉이 달걀을 끌어안고 밥도 안 먹고 시위를 해서 유정란을 사서 넣어줬다. 그런데 어머나 세상에! 보름 후 새끼 다섯 마리가 부화했고, 거기에 수탉이 생겨 다시 두 마리가 늘어 지금은 아홉 마리다. 암탉이 낳은 달걀로 아침을 대신할 때가 많다. 거창하게 ‘팜 투 테이블’ 아니냐고 외치며!   행복한 가드닝 요즘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만 했던 도시가 각성 중이다. 런던의 가장 번화한 곳, 피커딜리 서커스에 자리 잡은 포트넘 앤 메이슨 백화점은 옥상에서 벌을 키운다. 꿀이 생산되면 백화점에서 판매도 한다. 뉴욕에서는 1990년대 ‘옥상 텃밭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맨해튼의 수천여 식당에서 소비하는 채소를 인근에서 키울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 텃밭에 들어선 옥상식당은 늘 줄을 선다. 건물 대형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이용해 창문에 화분을 걸어 채소를 재배하는 ‘윈도 파밍’도 유행이다. 게다가 이제는 벌레를 쫓는 것이 아니라, 도시로 돌아오라고 집터를 마련해주고, 작은 동물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도 만든다.   나는 도시를 탈출했지만 모두가 이럴 일도 아니다. 도시에 자연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열어주면 된다. 그 틈으로 멀어진 자연이 성큼 돌아와 준다. 창가의 작은 화분으로도 그 시작은 충분하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09.06 00:10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약을 쳐야 할까요?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8년 전 내 손으로 심은 버드나무가 이젠 양손을 모아야 할 정도로 굵어졌다. 버드나무는 잎과 가지가 부드러워 바구니 등 공예품으로 만들기에 좋다. 생존력이 뛰어나 자른 가지를 땅에만 꽂아도 뿌리를 잘 내린다. 하지만 약점도 있어서 습도가 높은 여름철엔 잎과 줄기에 애벌레가 많이 낀다. 일부 잎은 거의 잎맥만 남는 수준이 되고, 균까지 번지면 초록색 잎이 거뭇하게 변색한다.   어제는 우리 집 버드나무의 이 참담한 꼴을 보다 못해 남편이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병든 가지를 대대적으로 잘라냈다. 그리곤 약을 빨리 쳐야 할 것 같다고 걱정한다.   행복한 가드닝 도시의 나무들은 여름철 알게 모르게 살충·살균제 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약을 치는 전문가들은 대강의 진실을 안다. 나무를 살리려는 의도보다 사람들이 벌레를 무서워하고, 징그러워하기 때문이다. 식물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들의 생과 사는 병충해보다 가뭄이나 폭우, 거센 바람 등에 의해 더 위협을 더 받는다.   식물과 벌레는 때론 죽음의 문턱까지도 갈 수 있지만 실제론 공생 관계일 때가 많다. 잎을 엄청나게 갉아먹는 애벌레는 훗날 나방이나 나비가 되어 꽃의 수분을 도와준다. 균도 마찬가지다. 식물을 숙주로 영양분을 갈취하기도 하지만 때론 질소를 공급해주는 일도 한다. 게다가 식물 또한 무작정 벌레를 그대로 두진 않는다. 잎에서 화학물질을 배출해 벌레들의 생식을 막거나 식욕을 잃게 한다.   아직껏 나는 정원생활을 하면서 이 약이라는 걸 쳐본 적이 없다. 나름의 방식으로 식물과 곤충은 서로를 방어하며 균형을 맞춰 살아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심었지만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와 균형이 나의 작은 정원에도 분명히 있다. 나 역시 벌레가 싫다. 하지만 조금만 너그럽게 이 자연의 조율과 균형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도 필요하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08.23 00:32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가을이 올까요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여름이 훑고 간 정원엔 상처가 가득하다. 털수염풀과 은사초처럼 빽빽한 잎을 지닌 식물들은 이미 누렇게 시들었고,  큰 식물 밑의 풀들도 올해의 생명력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이 여름은 나에게만 가혹했던 것이 아니라 식물들에 고통의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매년 힘들지 않았던 때가 없었지만 그래도 올해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 듯, 엊그제부터 속초엔 바람의 결이 사뭇 달랐다. 축축하지만 분명 찬 바람이 불었다. 북상 중인 태풍 탓이라는데, 무섭기로는 태풍이 더할지 몰라도 그 덕에 오븐 안처럼 나갈 구멍도 없이 뜨겁던 공기가 사라지니 잠시일지라도 한숨이 돌려진다.   행복한 가드닝 오늘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덕에 그간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정원을 향해 냅다 뛰어나갔다. 화단의 처참함이야 말해 무엇할까.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다졌는데, 그런데 웬걸 생각보다 그 여름의 고단함 속에서도 꼿꼿하게 견디어 씨를 잘 맺은 식물들이 보였다.   사람 키를 넘기는 펜넬은 꽃 진 자리에 어느새 탐스러운 씨를 맺는 중이었고, 아치에 매달린 덩굴 포도의 열매가 초록색에서 어느덧 보랏빛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지금껏 한 번도 수확을 못 해본 노란 사과가 네 알이나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아, 세상일은 왜 이리 대가를 오롯이 치르게 하는지 몰라도, 아무리 덥고, 힘들어도 묵묵히 할 일을 한 식물들에만 허락된 결실의 가을이 오는 중이었다. “가을이 올까요?” 난 올여름 내내 이런 의심을 했던 모양이다. 명료해진 머리가 답을 준다. 영어의 가을 ‘오텀(autumn)’은 와인 수확을 관장하는 신, 오포라의 시간이란 의미다. 우리말 ‘가을’에도 ‘거두다’라는 뜻이 있다.   이제 절기상으로도 입추를 넘겼다. 아직 남은 여름의 가혹함이 발목을 잡더라도 기어이 가을을 볼 일이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08.09 00:34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뿌리 없이 사는 식물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뿌리가 퇴화해 흙이 필요하지 않은 식물군이 있다. 공중에 떠 살아간다는 의미로 영어권에서는 ‘에어 플랜트(Air plant)’로도 부른다. 다른 식물에 붙어서 영양분이나 물을 뺏어가는 형태의 기생식물도 있지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더부살이를 하는 종도 많다. 그중 요새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틸란시아(Tillandsia sp)’라는 식물이 있다.   최근 이 식물이 실내식물로 사랑을 받고 있는데, 흙이 없어도 되니 선반 위에 올려두어도 되고 그릇에 담아 길러도 된다. 틸란시아는 뿌리가 없기에 물을 공급하는 방식도 매우 다르다. 식물 형태가 마치 장미꽃처럼 360도를 돌면서 낱장이 차곡차곡 덧붙여져 있는데, 정확하게는 꽃과 잎이 아니라 몸 전체가 이런 모양이다. 에어 플랜트가 이런 모양인 까닭은 겹쳐진 사이사이 공간에 빗물을 담아두기 위해서다. 빗물을 자신의 몸 안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 쓰는 방식이다.   행복한 가드닝 그리고 이 물은 혼자만 쓰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곤충과 동물들, 예를 들면 개미·벌·나비나 작은 새들에게도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해준다. 과학적으로는 에어 플랜트 식물들이 담고 있는 물로 인해 주변 땅의 온도가 낮아지고 습도가 높아지는 효과가 생긴다고 한다.   나비의 날갯짓이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에 따라서도 이 지구의 기후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다는 이론이 있다. 모든 것이 상상할 수도 없는 복잡함으로 이 생태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 여름이 정말 심상치가 않다.   이 지구의 위기를 이겨낼 답이 어디에 있을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물에도 그 답을 기대하게 되는 요즘이다. 틸란시아에게 물을 주는 요령은 샤워기를 틀고 전체 식물을 목욕시키듯 물을 적셔주면 된다. 집안마다 습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면 충분하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07.26 00:34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장마와 정원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보름간 집을 비웠다. 깜깜한 밤, 긴 여정을 마치고 속초 집에 들어서니 백합의 진한 향기가 후텁지근한 공기와 함께 코를 진동시켰다. 향수병을 쏟은 듯한 농도에 이미 백합이 만개했음을 알아차렸다. 백합은 늘 장마와 함께 꽃을 피워 고생을 참 많이 한다. 장마철이긴 해도 맑은 날도 본다. 며칠 비가 내린 후 활짝 개는 청명한 하늘은 얼마나 눈부신지! 참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맑은 하늘을 늘 장마철에 보게 된다.   비는 정원사에게 동전의 앞뒷면처럼, 반갑기도 하지만 근심이기도 하다. 여름철 땡볕에 타들어 가는 땅을 적셔주니 식물엔 더 없는 해갈이지만, 지나치면 피어난 꽃도 녹아버리고 잎도 주저앉게 된다. 같은 온대기후라고 해도 위도가 높은 영국 등 서유럽은 여름이 건기라 오히려 잔디가 누렇게 마른다. 그러니 우리 같은 여름철 위기는 겪지 않는다. 추위가 식물에 가장 치명적인 듯 보여도 정원에선 의외로 여름을 이겨내지 못하는 식물이 많다. 찬 바람을 좋아하는 자작나무도 습도 높은 장마나 열대야에선 수명을 다할 때가 많고, 건조한 기후를 자생지로 둔 톱풀·은사초·로즈마리·라벤더·달리아도 매우 위험해진다.   행복한 가드닝 오는 비를 막을 수도 없으니 이 식물들을 도와줄 방법도 딱히 없다. 다만 키 큰 식물은 꺾이지 않게 지지대를 세워주면 좀 낫고, 가늘고 촘촘한 잎을 지닌 은사초나 털수염풀 등은 아예 잎을 짧게 잘라주면 장마가 지난 후 다시 새싹을 돋우기도 한다. 잔디도 물을 오랫동안 머금고 있지 않게 바짝 잘라주는 것이 좋다.   그러나 모든 식물에 장마가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속담에 ‘장마가 길면 대추가 여물지 못하고, 장마가 짧으면 삼이 덜 자라 삼베를 못 만든다’는 말이 있다. 뭐든 다 좋고 다 나쁜 일은 없다. 장마도, 땡볕 여름도 지나가야 가을이 찾아오고 겨울이 온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07.12 00:34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여름꽃 백합의 기다림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6월 말에 접어들면서 정원도 느낌이 확 달라졌다. 잎이 무성해지면서 꽃 자체의 빼어난 자태가 돋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여름의 꽃은 키가 크고 색상도 화려하고 진한 편이다. 무성한 잎을 뚫고 벌과 나비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다.   정원의 매력을 묻는다면 ‘변화’라고 대답하고 싶다. 달이 보름 단위로 차오르고 사그라들 듯 정원에도 보름 간격으로 드라마 같은 변화가 찾아온다. 노란 해를 닮은 루드베키아가 시들 무렵, 백합이 피어날 것이다. 지금 잔뜩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가 이미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6월 끝자락에서 7월 초의 어느 순간 백합이 꽃봉오리를 활짝 열면 우린 그제야 ‘아, 꽃이 피었네’ 알아차리겠지만 실은 이미 3월부터 백합의 기다림은 시작됐다. 함께 싹을 올린 튤립·수선화가 만개해 절정의 시간을 누릴 때도 백합은 묵묵히 꽃대를 굵고 건강하게 키우는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행복한 가드닝 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은 한 해 전에 비축한 에너지로 꽃망울을 터뜨리고, 백합처럼 여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은 봄부터 여름까지 열심히 에너지를 모아 최고의 자태를 드러낸다. 봄꽃이나 여름꽃이나 준비 시간을 갖지 않으면 절대 때가 와도 꽃을 피울 수가 없다.   정원에 기적 같은 변화가 찾아오는 건 모두 이런 기다림 때문이다. 기다림이 길수록 꽃대도 굵어지고, 그 든든한 버팀목 덕분에 꽃도 커진다. 누가 번호표를 주고 순서를 매겨준 것은 아니지만 식물들은 자신이 꽃 피울 시기를 정확하게 알고, 그 기다림을 성실하게 견딘다. 뜨거운 여름 활짝 핀 백합을 보았다면, 그 꽃을 피우기 위한 6개월의 기다림과 노력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덤으로 원예 팁 하나. 백합처럼 꽃대가 높게 올라오는 식물은 지지대를 세워주는 게 좋다. 휘청거림이 심해지면 꽃을 피우는 데보다 줄기를 튼튼하게 하는 데 에너지를 쏟게 된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06.28 00:34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밤꽃이 피었습니다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아카시나무 꽃향기가 이제는 밤꽃 향기로 바뀌었다. 우리 집에도 밤나무 한 그루가 있다. 창고를 지을 때 사라질 뻔했던 걸 남편이 가지는 좀 자르더라도 나무는 남겨 달라 하여 겨우 살아남았다. 동네분들 말씀으로는 우리 집 밤나무가 이 동네에서 가장 실하고 맛있어 모두 함께 이 밤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 비록 가지의 3분의 1일이 잘렸지만 아직도 이 밤나무는 6월 중순에 꽃을 피우고, 10월이면 갓난아이 주먹만한 초록 밤송이를 맺는다.   밤나무는 가로수 나무로도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밤송이 탓에 도시에선 보기 힘든 나무가 됐다. 여러 가닥으로 내려온 줄기에 작은 밤꽃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모습은 얼핏 거미줄로 뒤덮인 듯 보이기도 한다. 밤꽃 향기는 호불호가 명확해 싫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의외의 반전이 있다.   행복한 가드닝 영국 의사 에드워드 베치(1886∼1936)는 1920년대부터 38가지의 식물이 우리 정서에 미치는 치유 효과를 연구했다. 그중에 밤나무가 포함됐는데, 베치 박사는 이 밤나무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치유하는 효능이 있다고 봤다. 모든 노력에도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힘겨움이 찾아올 때, 이 밤나무가 치유의 힘을 준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갑작스럽게 부모님을 잃은 탓인지 고질적으로 찾아오는 불안증이 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냐는 이 막연한 불안함은 매번 어지러운 꿈자리로도 이어진다. 이럴 때면 잠옷 차림으로라도 성큼 마당으로 나가 정원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한두 시간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그 불안함이 사그라지는 걸 경험한다. 그게 베치 박사가 말하는 식물 치유 효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삶이 무겁게 나를 누를 때 식물에라도 기대보면 어떨까 싶다. 어쩌면 피어난 밤꽃이, 그 향기가 길고 어두운 터널 끝의 빛을 보여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 오가든스 대표

    2023.06.14 00:34

  •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장미꽃 속에 담긴 우주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불을 때는 아궁이가 딸린 사랑채 옆에 작은 정원이 있는데, 거기 세워둔 아치에 8년 전 장미 네 그루를 심었다. 처음 몇 해는 꽃이 제법 잘 피어나더니 점점 세력이 약해져서, 작년 가을 가지치기를 할 때 제법 많이 잘라냈다. 세력이 약해진 식물은 응급처치로 이런 ‘강한 가지치기’를 해서 새순을 받아보는 것도 좋다. 올봄, 혹시 몰라 염려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는데, 더 굵고 실한 초록 가지가 뻗고서 작년보다 더 큰 꽃을 피워내니 고마운 마음이 가득이다.   행복한 가드닝 장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의 목록에 들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조금은 시큰둥한 마음으로 구색이 필요해 정원에 넣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에 장미꽃이 활짝 열리면 ‘아, 역시 장미는 장미구나’ 싶어진다. 꽃이 예뻐서만은 아니다. 가지 끝에 매달리는 장미꽃 봉우리는 생각보다 작다. 그런데 그 호리병을 닮은 꽃봉오리가 일단 열리고 나면 순식간에 수많은 꽃잎이 엄청난 속도로 피어난다. 이 신비로움은 마치 우주의 빅뱅을 목격하는 듯하다. 그래서 매년 5월이면 피어난 장미꽃을 보며, 누구의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장미 속 안에 담긴 우주’라는 말을 실감한다.   사실 요새 우주의 신비에 관심이 많다. 책을 읽다 보니 우주는 끝과 시작이 없어서 우리가 정의하는 크다, 작다, 멀다, 가깝다 등의 기준이 없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의 기준과 잣대가 생겨날 수 있는 건 오직 나의 존재가 거기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이다. 나로부터 가까운가, 나보다 작은가, 나보다 더 많은가 등등. 살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일들이 결국은 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라면 생각보다 많은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지 않으려나 싶다.   장미만 예쁠까. 나의 정원에 피어난 모든 꽃은 다 예쁘다. 나의 정원에 내가 심은 모든 꽃처럼, 이 우주에서의 나의 존재도 그 자체로 아름다울 것이라고 믿어본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3.05.31 00:34